붓다의향기/◈고분님의 향기

高玉芬님의 감성 사진일기

수정산 2021. 7. 25. 14:26

소나무가 있는 호숫가

{1}

그 해 나는 이른 아침 호숫가로 산책을 자주 나갔다.

"모든 아름다운 것은 야생적이고 자유롭다."고 Henry David Thoreau가 말했다.

그는 모든 생명의 내면에 숨어있는 "은자 베드로-신성의 상징적 존재로,불교식

으로 말하면 모든 중생 속에 깃들어 있는 불성의 의미"를 따라 문명과 세속의

더러움에 찌든 내면의 신성/야성/불성을 회복하기 위해 성지를 향해가는 과정이

곧 '산책(Walking)'이라고 하였다.

그는 길들여지지 않는 자연 본래의 상태, 교육이나 현대 문명에 길들여지지

않은 원시의 생명력, 활기, 선과 가장 가까운 것, 지식의 사원을 부숴버리는 저

번갯불 같은 내면의 야성을 찾아 산책을 나섰다고 한다.

그 해 나는 호수를 돌면서 순수한 것들에서 뿜어 나오는 야생의 음조를 읽지

못했다. 다만 그의 말대로 ' 호수는 자연의 응접실, 자연이 앉아서 몸단장을

한다.'에 마음을 빼앗기어 그 채색의 아름다움을 담았다.

자연의 대합실 호수에 오리떼가 물을 가르며, 새들은 호수 위를 날고, 개 한

마리 데리고 노인이 산책하는 구부정한 어깨 위로 나뭇잎들이 다음 역으로

떠나는 오솔길에 Blue Sky 하늘을 향하여 오로지 자존감을 지키는 소나무에

내 초라한 자아를 대입시켰다

 

{2}

연못 찾아온 Great Blue Heron의 망향

--Great Blue Heron의 행보 - Duke Garden에서 --

시간적 순서에 따른 왜가리의 행적에 포커스를 맞추었습니다.푸른빛과

잿빛을 지닌 깃털, 솔잎보다 더 가느다랗게 삐죽삐죽 뻗어내린 가슴 털이

하얗게 보이는 그의 자태는 그의 긴 목을 움추리고 있어도 그 위용에 가슴이

두근거렸습니다.

조심조심 가까이 다가가면서 날라갈까 조마조마한 마음이었습니다.

어쩌다 출사길에 호숫가에서 왜가리나 학을 만날 때마다 반가운 나머지 숲에

숨어 포커스를 맞추노라면 어찌나 눈치가 빠른지 이미 호수 건너편으로

날라가곤 하였습니다.

 

오늘은 어쩐 일인지 렌즈에 포착된 피사체가 움직이지 않습니다. 조금씩

조금씩 다가서도 그대로입니다. 찰칵찰칵 소리가 연속 나도 그는 정지한 채로

망연히 먼 곳만을 응시합니다. 10 m 밖에서 사람들이 바라보며 말소리를 내어도

'으악으악-'하며 가을 하늘을 날아간다는 통설 속 으악새인 이 왜가리는 꿈적도

아니합니다. 측은지심惻隱之心, 사람들의 눈빛은 사람을 피해 도망갈 줄 모르는,

사람들에 의해 길들여진 야생조인 왜가리에게 측은지심의 눈길을 줍니다. 한없는

하늘과 강물과 호수 그리고 갈대숲을 자유롭게 비상하던 그 날개 쭉지의 생태적

자유함을 잃어버린 그를 불쌍히 여깁니다.

문득 그의 발걸음 - 멈춰 서서 무거운 침묵을 이어가다가 그 가느다랗게 벌어진

발가락을 떼어 움직이고 다시 정지한 채 영원처럼 시간이 흐르고 다시 보행하는

걸음에서 예수의 12 제자 중 하나인 야곱의 무덤을 찾아가는 순례자의 길을

읽습니다. 작은 연못에 다다른 그의 모습은 새벽 하늘의 그 푸른 기가 감도는

신성하고 엄숙한 귀티까지 흐릅니다.

"묵상은 하나님의 진리 안에서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를 통해서 우리가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일이다. 자신을 버림으로써 자신을 찾는 일이다."

- 토머스 머튼 글에서-

허심하게 물가에 서있는 한 마리 새에게 인간의 묵상을 이입시키는 것이 지나친

것은 아닌가 생각이 들었지만 연못가에 망연히 서있는 그의 푸른 옷이 오래오래

망막에, 제 사진첩에 흔적으로 남아 있습니다.

 

 {3}

 

현관 앞 배롱나무의 한여름

 

오늘은 우리 집(NC, Cary) 현관으로 들어가는 길 양편에 휘어진

가지마다 배롱나무 꽃들이 매달려 있는 모습에 포커스를 맞췄다.

7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계절이라고 이육사 시인은 말했지만 이

낯선 이국 땅에서는 청포도조차 만나기가 어렵다. 그러나 7월은

곳곳에 하얗게 무리지어 피워대는 배롱나무 꽃으로 우리의 눈을,

마음을 달래준다.

얼마 전 이웃에 사시는 정원 선생님 댁에서 차와 과일 대접을 받고

나오다가 뜰 안에 있는 분홍빛 배롱나무를 만났다. 정원 선생님께서

인디언 라일락이라고 하셨다.

'목백일홍, 간지럼 타는 나무, 배롱나무' 라는 이름만 알고 있었는데

다른 이름이 또 있음에 반가왔다. 이따금 Duke Garden 출사길에

만나는 연보라빛의 무거운 꽃송이들이 그 무게로 인하여 가지마다

늘어져 있을 때 은은하게 내뿜는 향기로 라일락을 떠올렸던 기억이

겹쳤다. 그 외에도 중국 이름은 紫薇자미, 미국 이름으로 Crape myrtle

백일홍이라고 불러짐을 알았다. 원산지는 중국이고 따듯한 날씨인

아열대 지방에서 잘 자람을 알았다.

이곳 North Calorina, Cary에서는 가로수에도 많이 심겨져 있다.

허물갈이를 끝낸 오래 된 배롱나무의 껍질은 단단하고 대패로 밀어낸

듯이, 페인트를 칠한 듯이 매끄럽고 흠이 없다.

다산 정약용 선생님이 이 나무를 즐기셨다고 한다. 옛날부터 이 나무가

선비와 학자의 청렴 결백과 지조를 나타내어 선비들의 무덤 앞에 많이

심겨졌다고 한다.

이 귀한 배롱나무가 우리 집 현관 앞에서 한창 흰 빛으로, 주렁주렁 매달린

송이의 무거음에 가지가 휘휘 늘어지며 한여름의 청결함을, 겸허함을,

한결같은 지조를 드러낸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

 

좀처럼 눈을 만나기 어려운 NC에 소담스럽게 눈이 내려 쌓였다.

여름에는 화씨 100도가 넘고 겨울에도 춥지 않아 은퇴 인구가 이곳으로 몰려든다는

정도로 따듯한 겨울이 이어졌다.

오늘 드디어 자고 일어나니 온통 세상이 하얗게 바뀌었다. 사흘 동안만 백설의

아름다움으로 남아 있기를, 존재하기를 바라면서 나는 카메라를 목에 걸고 현관 밖으로

나갔다. 푹푹 발자국을 내면서 배롱나무 가지마다 소복히 쌓인 설경 곳곳에 포커스를

맞추며 즐거웠다.

사라짐의 가벼움 뒤에 순간 포착으로 영원히 남아있는 할머니의 흔적을 남기고 싶었다.

눈은 곧 사라지지만 내 아이들이 믿음의 씨앗 하나 뿌리 깊게 내려져 봄이 되면 새롭게

싹이 트고 꽃이 피기를 바라는 마음 담아 여기저기 카메라를 들이대었다.

{4}

노을빛 변주곡이 흐르는 호숫가 풍경

 

그날 추수감사절도 지난 늦가을 저녁나절 아이들과 Crab Tree Lake를 찾았다.

가을의 잔재들, 이미 고운 색이 퇴색하여 빛을 잃은 낙엽들을 밟으며 홋숫가를 향했다.

11월 그 가을의 끝에서 가을과의 고별식을 나누었다.

늦가을의 저녁은 도둑 고양이처럼 몰래 숨어들더니 야외용 그릴에서 조개탄이 활활

타오르는 불빛과 함께 붉은 석양의 빛이 하늘에 퍼지고 순간순간 그 노을빛이 색조를

달리하는 변주를 연주하고 있었다. 나는 카메라를 목에 걸고 이 노을빛들이 분홍빛,

주홍빛, 노란빛, 옥빛, 푸른빛, 보라빛 색깔- - - 등으로 연주하며 곧 사라질 추상적

존재를 묵시로, 채색으로 드러내는 순간순간의 피사체에 빠졌다. 하늘빛의 변주색,

저 노을빛의 채색과 채색이 어우러져 어느 광인의 화폭이 강물처럼 흘러흘러 내 안에

임리하였다.

노을빛은 고향으로 돌아감의 부추김이며 어머니를 그리는 마음빛이다.노을빛은 이 땅을

고집하여 돌아가지 못하는 부끄러움이며 나를 내려놓지 못하는 자괴감이다. 하여 노을빛은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목이며, 저 노을 건너편 산 모퉁이 본향으로 돌아가는 '돌이킴'의 반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