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경기인천

운현궁 답사

수정산 2024. 3. 28. 23:04

천안 사는 둘째 동생이 시내 볼일이 있어 왔다가 점심을 함께하고 미답지였던 고궁

운현궁을 조용히 둘러보는 답사의 기회가 참 좋았음.

송해길을 걸어 서울교동초교 앞을 지나 향기 나는 매화꽃 보며

걷는 길 바로 옆에 자리한

운현궁을 답사하며

지나 온 역사를 돌아보게 됨.

운현궁

지정번호: 사적 제257호

시대: 1864년[고종 1],

        1996년 중수

소재지:

서울시 종로구 삼일대로 464

이곳은 조선 26대 임금인 고종이 등극하기 전에 살았던 잠저로서,

생부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집임

흥선대원군은 이곳을 무대로 10여 년간 집정하면서 어린 아들을 대신해서 정치를 했다.

서운관이 있던 고개에서 유래된 지명을 따서 운현궁이라 불렀다.

1864년 [고종 1]에 노안당과 노락당을 짓고 1869년 [고종 6]에는 이로당과 경로당을 세웠다.

창덕궁을 쉽게 드나들도록 고종 전용 경근문과 흥선대원군을 위한 공근문을 두었으나

지금은 남아있지 않다. 1912년에는 약관을 세워 손님 맞는 곳으로 사용하였다.

 

노안당은 흥선대원군이 국정을 논의하던 곳이며 노락당은 안채,

이로당은 별채로 쓰였다.

그 규모나 격식, 평면 모양으로 볼 때, 사대부 집이라기보다는 궁궐내전에 가깝다.

흥선대원군이 세상을 떠난 후 큰 아들인 이재면을 거처 손자 이준용에게 상속되었으나 

한국전쟁 이후 상당 부분이 팔리면서 집의 규모가 크게 줄었다.

 

명성황후, 1851~1895.

조선 고종의 황후. 여성 부원군 민치록의 딸이다. 8살에 아버지를 잃었으며, [1866 [고종 3] 외척 세도정치의 세력 기반을

없애기 위하여 흥선대원군의 부인인 부대부인 민 씨의 추천을 받아 16살에 왕비로 책봉되었다.

1895년 일본의 만행으로 경복궁에서 시해되었고, 대한제국이 성립된 1897년 황후로 추증됐다.

대원군 교의

제례 때 조상의 위패를

모시는 단으로 시동이라 불리던 어린 사내아이를 의자에 앉혀 놓던 관습에서 비롯되었다.

후에 시동이 신주라는 상징적 매체로 바귀면서 교의는 앉는다는 실용적 목적보다 신주를

봉안한다는 상징성을 갖게 되었다.

역사 공부하는 울 동생.

이로당은 노락당과 함께 운현궁의 안채로 쓰였다. 이로는 흥선대원군의 부대부인 여흥 민 씨를 의미하는 말로 해석한다.

1866년[고종 3] 고종과 명성황후의 가례 이후, 그들이 운현궁을 방문할 때 노락당을 거쳐로 사용하였다.

노락당이 안채에서 별궁으로 역할이 바뀌자 새로운 안채가 필요해졌고 노안당 노락당 보다 뒤늦은 1869년 [고종 6]에

이로당을 지었다. 이로당 뒤편의 '현 운니동 김승현 가옥'[서울시 민속문화재]는 원래 운현궁에 속한 건물 가운데 하나로

 '영로당'이라 불렀다.

운현궁 답사를 함께 한 동생.

운현궁 답사 후 밖으로 나와

벽길따라 창덕궁 가는 길.

 

이슬비 내리다 그친 흐림의 미학

조용한 분위기 고고한 고택 분위기까지 역사의 현장을 둘러보며 옛 성인들의 지혜에 놀라움.

감사합니다.

20234. 03. 28. 목욜.

'◈서울경기인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창덕궁 후원 답사  (0) 2024.03.29
창덕궁 홍매화  (0) 2024.03.29
신구 식물원에서  (0) 2024.03.27
고령산 앵무봉  (0) 2024.03.27
고령산 보광사  (0) 2024.03.26